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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간다. 아버지

솔바람. 2010. 10. 27. 23:00

 아래 글은 한국경제신문 천자칼럼에 실린글중에 글이 좋아서 2편을 옮깁니다.

 

봄날은 간다

 

20대의 18번이었다. 덕분에 그 시절부터 알던 이들을 만나면 으레 불러야 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

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

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

1절도 좋지만 2절이 더 괜찮았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봄날은 간다'>

지금도 알지 못한다. 돌이켜 보면 분명 화창한 봄날이었으나 정작 그땐 고단하고 불안해 인생의 봄

날인 줄조차 몰랐던 20대에 왜 그 노래를 그토록 즐겨 불렀는지.아무튼 몇몇이 모여 돌아가며 한 곡

씩 뽑을 때는 물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면 혼자서도 곧잘 흥얼거렸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에서 목청을 돋우다 '알뜰한'에서 꺾어 '봄날은 간다'에 이르러 한숨을 쏟아내

면 가슴 속 응어리가 풀리곤 했다. 구성지고 서글픈 가락이 지닌 묘한 카타르시스 효과 때문인지,제

목의 상징성 덕인지 노래는 고전이 됐다.

6 · 25전쟁 직후인 1953년 백설희씨에 의해 발표된 뒤 60년 가까이 남녀노소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게 그것이다. 중장년층 사이에 주로 불리던 노래는 2001년 가을 이영애 유지태 주연의 동명(同

名) 영화가 히트하면서 젊은층에도 널리 퍼졌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는 애절한 물음 앞에 "헤어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선 사람을 그리며 부

르는 노래는 사랑을 잃고 우는 젊은 남녀의 마음을 적시며 크게 유행했다. 조용필 심수봉 장사익씨

등 리메이크한 가수도 많은데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선다.

장사익씨의 유장한 소리는 처연하고 조용필씨의 노래는 속절없이 지는 봄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

한다. 이름처럼 맑고 고운 목소리의 가수 백설희씨가 세상을 떠났다. 악극단 배우를 거쳐 '봄날은 간

다'로 가수로서의 봄날을 열었던 이가 라일락 꽃잎 흩날리는 봄날 스러졌다.

'산다는 건 하나씩 없어지는 걸 겪는 것'(구효서)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천하를

다 얻은 것 같던 사랑을 잃기도 하고,승승장구하다 한순간 점점 작아지는 상자에 갇힌 것처럼 되기

도 한다. 봄이 가고 있다. 어쩌랴. 먼 훗날 잠에서 깼을 때 후회할 일을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 [천자칼럼]

 

 

 

아버지
 
시골 아버지가 대학생 아들에게 꼬박꼬박 부치던 용돈을 끊었다. 아들이 전보를 쳤다. '당신 아들,굶

어 죽음.'아버지는 이런 답장을 보냈다. '그래,굶어 죽어라.'화가 난 아들은 연락을 두절한 채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아들은 아버지의 전보가 인생의 전기가 됐다는 것을 깨닫는

다. 서둘러 고향집을 찾았으나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유서 한장이 남아 있었다. '아들아,너를

기다리다 먼저 간다. 네가 소식을 끊은 뒤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언제나 너를 사랑했

다. '

한때 사이버 공간을 떠돌던 이 이야기에서처럼 아버지의 정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만큼 속이 깊

다. 자식들 사랑한다는 표현도 애틋하게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놓고 걱정하거나 슬퍼할 수도 없다.

김현승 시인은 그 처지를 '아버지의 마음'에서 이렇게 읊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

나/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묵묵히 참아내다 보니 늘 상처를 안고 산다. 비굴할 정도로 몸을 낮추기도 한다.

휴지처럼 구겨진 몸으로 식구들 먹을 것 사들고 노을 물든 차창에 흔들리는 퇴근길이 그나마 위안이

다. '까칠한 주름살에도/부드러운 석양의 입김이 어리우고/상사를 받들던 여윈 손가락 끝에도/십원

짜리 눈깔사탕이 고이 쥐어지는/시간/가난하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그 아들딸 앞에 돌아오는/초라

한 아버지'(문병란 '아버지의 귀로'중).

TV 예능프로그램에 소개된 초등학생의 '아빠는 왜?'라는 시가 인터넷 트위터 등으로 퍼지면서 가슴

을 아릿하게 하고 있다. '엄마가 있어 좋다/나를 이뻐해주어서/냉장고가 있어 좋다/나에게 먹을 것

을 주어서/강아지가 있어 좋다/나랑 놀아주어서/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 아빠들이 관심을 갖

고 좀 더 노력하라면서 자성을 촉구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거나 '눈물나는 아빠들의 초상' 등

애처로워하는 글도 많다고 한다.

엄마 노릇,자식 노릇이라고 쉬울 리 없지만 이 시대 아버지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사

할 때 이삿짐 트럭에 아버지가 제일 먼저 올라 앉는다는 서글픈 우스개도 있다. 아내와 아이들이 버

리고 갈까봐 무서워서란다. 가정에서조차 밀려나고 있는 아버지들이 마음 둘 곳은 어디인가.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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