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 (完)
금북정맥 12 구간 (29번도로~수리치골성지)
솔바람.
2011. 11. 1. 21:16
산행일시 : 2011년 7월 21일 (목요당일)
산행위치 : 충남 청양. 공주.
산행코스 : 29번도로-문박산-645도로-금자봉-424봉-성지갈림길-2.9km수리치골 성지주차장
산행거리 : 14.8 km
산행시간 : 5시간 50분 소요
주요지점 통과 시간
10 : 52 청양농협 장례식장 산행시작
11 : 07 225봉
11 : 47 문박산 정상
12 : 18 645번 지방도로
12 : 31 96번 도로
14 : 03 금자봉
14 : 27 운곡고개
14 : 55 424.4봉
16 : 21 탑봉 (440.0 m)
16 : 40 수리치골성지 산행종료
총소요시간 : 약 5시간 50분
주유소 맞은편으로
지난번에 날목이었던 청양백천리의 29번도로 gs칼텍스 주유소 맞은편으로 둘머리
소나무길 아주 좋음 문박산이 바로보임
645번 지방도로. 표지판에는 70번 지방도라 적혀있습니다 ??
96번 지방도
자연 동굴이 있슴
365봉에서도 성지수련원쪽으로 하산길이 있슴
수리봉가기전 0.2km전에서 십자가봉 하산함(탑봉)
수리치성지골 수련원 입구 오늘산행 날머리
수리치골성지(수리취나물이 많은곳이라 이름 붙임)
수리치골-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산 116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이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이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리치골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고 주교에 의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구성되어 공주 지방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성모 성심 수도회는 원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로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즈네트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하권)에서 수리치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경당이 없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외딴곳에 열심한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 4일 뒤 선교사들은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데즈네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수리치골에 이렇게 세운 작은 신도회를 그의 명부에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 후 다블뤼 안 주교가 쓴 편지에서는 성모 성심회가 기도하고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듣는 감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현재 수리치골에는 미리내 천주 성삼 수도회의 수련원이 설치돼 있다. 수리치골을 찾는 이들은 32번 국도에서 갈라져 약 3.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이정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옛 교우촌 자리에는 게쎄마니동산이 꾸며져 있고 여기에는 야외 제대가 마련돼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내 잡지 등에서도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 마리아의 단체들에게 수리치골은 하나의 성지가 된다."며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그곳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수리치골은 한국 교회의 사적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수리치골, 둠벙이, 진밭, 황모실 - 감추어진 공소·본당의 중심지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조선 교회가 유지되어 나가고 자신들이 계속 이땅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성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성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신풍면 봉갑리)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이 회의 설립 동기와 과정에 대하여 교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본부를 둔 ''성모 성심회''를 조선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이 게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경당(經堂)이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그들은 외딴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신입 교우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 잡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들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하, 136-137면).
위의 기록을 볼 때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한 신입 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와 선교사들이 이 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주일마다 신자 몇 명이 이 곳에 와서 하느님의 어머니 성화 앞에서 몇 가지 기도문을 외우기로 결정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후 신자들은 이 곳에 모여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게 되었다.
성모 성심회를 창립할 무렵에 다블뤼 신부는 주로 둠벙이를 거처로 삼고 있었는데, 1854년에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심한 뇌염에 걸린 쟝수(Jansou, 楊) 신부가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쟝수 신부는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1854년 6월 18일 둠벙이에서 선종하여 그 곳에 안장되었다. 또 그 무렵에는 ''진밭'' 교우촌(공주군 사곡면 신영리)도 공소로 설정되어 있었다.
1861년 이래 둠벙이에 새로 입국한 죠안느(Joanne, 吳) 신부가 거처하면서 이 곳은 본당 중심지의 하나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병으로 1863년 4월 13일 둠벙이 교우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때마침 진밭에 거처하던 리델 신부는 그에게 성사를 주고 난 뒤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였다.
부활 축일 전날 죠안느 신부가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종부 성사를 주고 그와 함께 밤을 지냈습니다. 그 동안 그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자주 화살 기도와 천주께 대한 열렬한 갈망의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 4월 13일 월요일 정오쯤에 그는 두 번 하늘을 향해 눈과 팔을 올리고 미소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녁 7시 반에 조용히, 그리고 아무런 동요 없이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천주께 바쳤습니다(리델 신부의 1863년 9월 9일자 서한).
31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 죠안느 신부의 시신을 신자들은 둠벙이 마을의 동족 골짜기에 안장하였다. 그의 무덤은 지금까지 그 곳 산 중턱에 남아 있는데, 이름없는 교우촌 신자들의 무덤 몇 기가 그 아래에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 둠벙이 교우촌과 같이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승격되고, 그 곳에 거처하던 선교사 2명이 선종한 또 하나의 교우촌이 있었다. 지금은 비록 신앙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합덕에서 덕산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위치한 한적한 농촌 마을 ''황모실''(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이 그 곳이다. 이곳에서는 1858년에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1863년에 랑드르(Landre, 洪) 신부가 선종하여 뒷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그러나 1970년 4월 30일 두 선교사의 유해가 합덕 성당 경내로 이장되면서 황모실은 기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사적지가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8호(1999년 9월호), pp.119-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