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금북정맥 7 구간 (분젓치~모래재)
한남금북정맥 7구간 (분젓치-모래재)
산행일시 : 2011년 11월 03일 목요일
산행위치: 충북 증평군.괴산군
산행코스 : 분젓치-430봉-536봉-방고개-538봉-좌구산(658m)-588봉-삼군봉(612m)-새작골산(568m)--질마재-410봉- 460 봉-415.2봉-칠보치-406.6봉-450봉-칠보산(542m)-550봉-쪽지봉(596.6m)-465봉-
송치재-390봉-344.1봉-모래재
산행거리 : 실측거리 18.4 km (도상거리 16 km)
산행시간 : 약 6시간 30분
위 등산지도는 새마포산악회에서 퍼왔습니다
좌구산(657m)은 증평군과 청원군의 최고봉이며 한남금북정맥 상에 위치하는 증평군의 명산이다. 이 산에는 증평군 증평읍과 청원군 미원면을 잇는 두 고개가 있다. 이 중 증평군 증평읍 율리의 부점촌과 청원군 미원면 화원리의 삼흥을 잇는 방고개(해발 360m)는 또 다른 고갯길인 분젓치(해발 340m)와 함께 증평에서 미원으로 넘나드는 고갯길이다. 분젓치와는 상대적으로 길이 외지며 높이로는 분젓치 보다 약 20m 가량 높은 방고개는 지금은 비포장 길이지만 임도가 잘 닦여있어서 승용차로 오르내리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이다.
좌구산은 충북 속리산 천황봉(千皇峰)에서 경기 안성군 칠장산(七長山)에 이르는 한남금북정맥을 종주하고자 하는 산꾼들에게나 알려졌을 뿐 이름 없는 산골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그 넉넉한 품을 내어주는 숨은 명산이었다. 이처럼 산꾼들과 산골마을 사람들만 알고 있을 뿐,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 산은 2003년 8월 30일 증평군이 개청하면서 군의 관심을 받았고 2007년 8월 현재 증평의 명산으로 우뚝 솟았다.
앉을 ´좌(坐)´자 거북 ´구(龜)´자.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해서 좌구산(좌구산)이라 쓰는데 여기서는 최고 높은 봉우린데
옛날에는 난리가 나면 봉화를 올리던 자리가 있어. 그런데 원래는 그게 그 위에 가면 봉화를 올리던 자리가 있어.
그런데 원래는 그게 좌구산(坐狗山)이 아니고 앉을 ´좌(坐)´자 개 ´구(拘)´자. 좌구산(坐狗山)였데. 왜 그러냐 하면, 예전에는 민가가 없었어. 그냥 산밖에 없었는데 그 산에 올라가면 개짖는 소리가 났데여. 그래서 좌구산(坐狗山)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풍수적으로 말해서 좌구산(坐狗山)으로 고쳤다
오늘산행의 들머리 분젓치. 좌구산 4 km 이네요.
방고개의정자와 건너보이는 천문대
방고개에 좌구산 천문대가 정맥길에 위치합니다.
좌구산 오르기전의 돌탑봉
좌구산은 미원면 대덕리와 증평군 증평읍 율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청원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좌구산에는 정상석 받침대만 남아있고 무슨연유인지 정상석은 사라져없어 아쉬움이 더한다.
예전에 있던 정상석 사진입니다.
2005년에 미원면민과 청원군청이 뜻을모아 세웠다는 정상석사진입니다 .참고하시라고 올렸습니다.
좌구산정상에서 바라본 지나온 정맥길 구녀산방향
좌구산 삼각점 확인
좌구산 정상에서 본 조망
삼군봉정상
새작골산 정상의 삼거리 이정표 가야할 질마재 1.3 km입니다
질마재 (592번지방도) 를 건너서
칠보치
칠보산과 쪽지봉 갈림길
칠보산은 갈림길에서 30m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함
칠보산정상
송치재의 철망을 지나도 지도상 봉우리 3봉인데 가도가도 끝이없는 모래재는 6봉우리 지나야됨
송치재 돌탑이 있슴 여기서 3봉을 지나야 모래재
의성김씨지묘 방향으로 올라가야합니다
묘지에서 뒤돌아본 칠보산
관광농원 뒤편의 통신철탑
보광산 관광농원뒤 통신안테나 방향으로 내려오면 농원안으로 하산길입니다.
모래재 하산지점 보광산 관광농원안으로 들어오면 씻을수 있는 식수대가가 있슴
모래재에 세워진 의병격전유적비 안내판
이 유적비는 의병장 한봉수(韓鳳洙)를 주축으로 모래재에서 일어난 항일구국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한봉수 선생은 1883년 4월 18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동년 8월(음)에 의병장 김규환(金奎煥)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일군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맹활약하였다.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를 조직하였으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오근장(梧根場) 부근에서 일본 헌병대위 도기선치(島崎善治)를 사살하고 강원도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일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렀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의 국장에 즈음하여 홍명희 ․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주도하였고,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괴산군에서는 국권회복과 민족의 정통성을 이으려는 선열의 우국충정을 길이 전하고자 1984년에 높이 3M 넓이 2.5M 크기의 이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안내판 설명)
오늘산행의 하산지점인 모래재